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기산심해 (氣山心海)="기운은 산과 같이 굳세고, 마음은 바다같이 넓다"는 뜻이다. 운좋게 좌수서예가 석천 김병호 명인께서 일필휘지 써준게 있다.

근데 조선시대의 명필, 한호 한석봉이 기산심해와 같은 마음으로 글씨를 썼다고 한다. 나와 관계없는 분이지만 이름이 같아서 남같지 않은 분이다. 애써 이것도 인연으로 엮고 싶은 것은 꿈을 지킬 '빽'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냥 장식 정도로 생각해오던 이 액자의 글이 오늘따라 눈에 팍 박힌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이 글을 마음에 새기고 미래로 그려 나가야겠다.

그럼 좌수서 깁병호 선생이 누구인지 한번 살펴보자. 2011년 관련 기사다.

[오른손 장애 극복 ‘왼손서예 명인’ 된 김병호]

ㆍ선천성 소아마비 딛고, 붓글씨로 시련 이겨내
ㆍ외동딸 잃고 절망과 恨, 예술혼으로 승화시켜

세월은 촌부의 살을 말리고 뼈를 오그라뜨렸지만, 명인이 된 그의 필치는 여전히 역동적이다. 2008년 9월 ㈔대한명인문화예술교류회가 명인으로 추대한 서예가 김병호 선생(68)은 원체 가늘고 여린 외양 탓에 불면 날아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괜한 걱정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부산 초량의 허름한 건물 2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 가득한 서예 작품은 용이 제 하늘을 만난 듯 똬리 풀고 솟구치는 듯 했고, 호랑이가 밀림을 호령하듯 포효를 내뿜는 듯한 힘이 느껴졌다. 좌청룡 우백호의 정기를 받고 있으니 칠순을 앞둔 서예 명인에게서 아우라가 엿보였다.

좌수서예 명인 김병호 선생이 부산 초량의 허름한 건물 2층에 있는 개인 작업실에서 일필휘지로 ‘기산심해(氣山心海)’를 쓰고 있다. 이 글은 김병호 선생이 애착을 가진 4자성어로 “기운이 산과 같고 마음씀이 바다와 같다”는 뜻을 담고 있다.

▨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서예와의 만남
 
김 선생은 웃음을 달고 산다. 그러나 그의 웃음 속엔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 역경이 숨어 있다. 그는 선천성 소아마비를 앓아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손·발이 자유롭지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그에게 내려진 지체장애 3급이라는 ‘천형’이 좌수서(왼손으로 붓글씨를 쓰는 사람) 명인이라는 ‘천운’을 선사한 셈이다. 하지만 서예 인생 60년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김 선생은 그간의 세월을 돌아보며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었다. 서예는 내가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희망을 되찾을 수 있게 한 유일한 힘”이라고 운을 뗐다. 서예가에게 있어 오른손 장애는 치명적이다. 자유롭지 않으니 왼손 서예를 익힐 수 밖에 없었지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을 써야하는 서예의 특성상 좌수서로 이름을 올리기 쉽지 않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다른 길은 없었다. 밖에 나가 뛰놀 수 없었던 어린 병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당시 서예와 한학 정도 밖에 없었던 것. 한의사였던 아버지는 소아마비 아들을 살리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고, 그나마 어린 병호가 혼자 걷고 느리게 나마 세상을 개척한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아들에게 손수 서예와 한학을 가르치며 미래를 열게 했다.
 
서예는 6살부터 시작했고, 천자문은 8살이 되던 해부터 그의 삶과 함께 했다. 또래들은 제 나이에 학교에 갔지만, 어린 병호는 이듬해가 돼서야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학교는 그에게 세상에서 겪어야 할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게만 만들었다. 초·중·고교로 이어지면서 시쳇말로 ‘왕따’의 대상이 됐던 그는 영남상고를 중도에 포기하면서 학교와의 인연을 접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그의 눈에 영화 간판이 들어왔다. 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그림을 그려야 하는 일이기에 극장 관계자가 손사래를 쳤지만, 오기가 발동해 끈덕지게 매달렸다. 당시는 영화 뿐만 아니라 당대 톱 스타들도 극장쇼에 열을 올리던 때였다. 대도극장 등에서 대나무에 분필을 꽂아, 할리우드 스타며 국내 스타들의 얼굴을 판박이로 베껴내는 솜씨에 관계자들이 환호했다. 청년 김병호는 실력이 있으면, 장애를 보기보다 능력을 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 시련을 예술혼으로 녹여내다
 
세상이 처음으로 달리 보이던 그 때 아내인 허두선씨(65)도 만났다. 여전히 손을 꼭잡고 길거리를 다니는 식을 줄 모르는 황혼의 사랑은, 처음 만났을 때의 초심과 다름이 없다. 그는 아내에 대해 “저의 예술 세계를 제일 잘 알아주는 친구다. 가난할 때도 하루 10여 시간씩 서예에 몰두하는 저에게 잔소리하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고 칭찬에 입이 마르지 않았다. 결혼 후 한동안 멀리하던 서예도 다시 만났다. 여전히 가난했지만, 부러울 게 없었던 그는 오래지 않아 현대미술창작전의 동양화·서예 부문 특선 등 각종 미술 대회에서 상을 휩쓸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하늘의 시샘은 그의 행복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다. 어찌보면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일 게다. 김 선생은 “1997년 3월 27살의 꽃다운 딸을 잃었다”며 지갑 속에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딸의 사원증을 내보였다. 갑작스런 사고로 대기업에 다니던 딸이 유명을 달리했고, 그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한동안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다. 더 이상 세상을 살 의미가 없어졌다고도 생각했다.
 
그 때 그는 어렵게 붓을 들었다. 꽃중의 꽃이라는 모란(목단화)을 그리며, 딸에 대한 진혼(鎭魂)의 염을 이어갔다. 그 작품 속에 유독 모란이 많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온 신경을 집중하다 보니, 속상함이 사라지더라”고 고백한다. 가슴 속 응어리가 작품으로 승화되면서 새로운 삶을 이어갈 용기도 생겨났다. 그리고 그의 호에서 따온 석천체도 체계화 됐다. 서예 전문가들은 “석천체는 글씨가 마치 한마리 용처럼 꿈틀거리고, 흰구름과 먹구름이 교차하면서 운우가 내리는 듯 한 인상을 준다. 특히 사람들 앞에서 즉석 휘호를 써 줄 정도로 강단있는 필치”라고 설명한다.
 
김 선생은 최근 기분 좋은 평가를 또 하나 받았다. 세계 최초로 누진다초점렌즈를 개발한 안경렌즈 업체 ㈜에실로코리아가 김 선생의 장인 정신을 높이 평가해 장인후원캠페인의 후원 대상자로 선정한 것이다. 이 덕에 편안한 시야로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게 됐다.
 
고통을 통해 예술을 농익혀 온 김 선생은 “누구나 뜻하지 않게 아픔을 겪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이라며 묵향 가득한 미소를 던졌다.
 

 

Posted by 뒤따리오

댓글을 달아 주세요